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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체험사례 ]

j미르호 2011. 1. 21. 12:41

[만병통치 등산 | 질병극복 체험사례 ①] 척추협착증 이겨낸 김세정씨

척추협착증 이겨낸 김세정씨

“걷기와 노르딕워킹으로 제 삶이 바뀌었어요” 

“척추협착증은 허리 디스크가 빠져나가서 뼈하고 뼈가 부딪쳐서 마찰이 생기는 거예요.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만 굉장히 통증이 심해요. 신경이 눌려서 다리를 잘 쓰지 못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척추 엑스레이를 보여주며 담담히 얘기하는 김세정(42)씨는 2006년 척추협착증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집안 자체가 1자 허리라 선천적으로 척추가 약했고 무리한 야근과 잘못된 자세 탓에 병이 생겼다. 어느 날 아침, 누워서 일어나질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30분을 끙끙대다 겨우 벽을 짚고 일어났다. 김씨는 한의원에 가서 침 맞으면 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나아지지 않아 병원을 가니 디스크 하나가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병원에서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지만 우연히 본 TV에서 정형외과 의사가 일상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면 수술보다 운동을 권한다는 얘길 듣고 산에 가기 시작했다.

“직장이고 뭐고 다 그만둬야 했어요. 집이 인왕산 근처에 있어서 길가에 뒹구는 작대기 짚고 척추가 휜 채로 낑낑대며 올라갔어요. 매일 산에 올라갔는데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산행거리가 늘어났어요. 목숨을 걸고 걷는다는 마음으로 아침저녁으로 걸었어요.”

걸어 다닐 수 있는 시간은 늘어났지만 김씨는 여전히 고민이었다. 다리 힘으로 걷긴 하지만 자세를 조금만 옆으로 틀거나 하면 통증이 심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몸의 유연성을 잡으려면 다른 걷기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마침 노르딕워킹 강사를 만났다.

“호기심에 시작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다른 운동은 2~3개월 지나면 지루해서 혼자 못 하는데, 중독증세가 생길 정도로 노르딕워킹에 빠졌어요.”

노르딕워킹은 핀란드 크로스컨트리스키 선수들이 눈이 없는 여름에 롤러를 타고 아스팔트에서 훈련하던 방법에서 고안되었으며, 1990년대부터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노르딕워킹은 등산처럼 스틱을 양손에 들고 걷는 것이지만 주로 평지에서 스틱을 비스듬히 눕혀 걸음에 맞춰 지면을 밀면서 워킹하는 것이다. 김씨는 이것이 “관절과 척추에 가해지는 체중의 부담을 줄여주고 상하체에 전신운동을 시켜줘서 허리근육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6개월을 걷자 어떤 자세를 취해도 통증이 사라질 정도가 되었고 8개월 정도 후에는 아예 독일에 노르딕워킹 국제코치 시험을 치러 가서, 결국 자격증을 가지고 돌아왔다. 한국노르딕워킹협회 코치인 김세정씨는 잘못 걷는 사람들이 산에 많다고 한다. 무겁게 지고 잘못 걸으면 아무리 등산을 열심히 해도 나이 들어 관절염이 생긴다고 얘기한다.

“그냥 워킹은 팔은 흔들지만 어깨를 흔들진 않아요. 노르딕워킹은 어깨 자체를 움직이고 어깨뼈와 골반이 걸을 때 교차가 되요. 그런 전신운동 동작을 하게끔 자연스레 만들어 주는 게 노르딕스틱이에요.”

걷기와 노르딕워킹으로 삶이 바뀌었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그녀는 아예 노르딕워킹 제품 판매점을 하고 있다. 척추협착증 환자가 아닌 코치로 말이다.

기록적인 산행을 하며 간암과 직장암 치료한 문정남씨

“산은 암을 고친 명의”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암이라니…. 산행도 잘 하고 누가 봐도 이렇게 강건한 체질인데, 참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문정남(71)씨는 2000년 30년 가까이 했던 교직에서 물러나며 여가 시간을 등산에 몰두하기로 결심한다. 500산을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산행에 몰두하다 300산쯤 올랐을 때 직장암 진단을 받는다. 치료를 해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던 그는 숙고 끝에 수술을 받는다. 수술 전 25일 동안 물 한 모금 안 마시며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어야 했고 산에 다니던 사람이 병실에 갇혀 있으려니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그러나 수술 결과는 실패였다. 수술을 준비하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던 문정남씨는 재수술을 거부했으나 결국 우여곡절 끝에 재수술을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수술 후 치료방법은 항암주사를 맞는 것이었다. 1주일에 5일 동안 항암주사를 맞고 3주를 쉬는 방법으로 6개월을 치료받았다. 그는 이 기간에도 산행을 계속했다. 아무리 수술을 마쳤다 해도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산행을 하는 이는 흔치 않다.

“의사 말이 암에 걸리는 제일 큰 이유가 스트레스고, 둘째가 음주와 흡연, 셋째가 과도한 육류 섭취, 넷째가 성격이라고 합디다. 근데 암세포는 산소함량이 높은 곳에서 활동이 지연되거나 없어진다고 해서 산행이 제일 좋은 치료법이라 생각한 거죠.”

다른 항암치료 환자들과 달리 산에 갈 체력이 있었던 그는 부지런히 산을 올랐다. 그러나 항암치료 6개월 후 종합검진을 받아보니 결과는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는 것이었다. 문씨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이제는 진짜 죽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그렇게 산을 열심히 다녔는데 그럴리 없다며 병원을 옮겨 검사 받아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산행이 최고의 암 치료제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결연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죽는 순간까지 암세포와 싸워보기로 했지요. 죽기를 각오하고 한 달 동안 산행을 했습니다. 한 달 후 간암 수술을 받으려 입원했는데 마지막 CT촬영을 한 결과, 암세포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의사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너무 놀랐습니다.”

암이 사라진 것에 대해 그는 간절함 때문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산에 가면 큰 소나무를 끌어안고 심호흡을 하며 기원했다. 기원한 내용은 암을 낫게 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단지 500산을 다 오를 수 있도록 그때까지만이라도 삶을 연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종교 있는 사람들은 무슨 소나무한테 비느냐고 했지만 그게 그만의 기도 방법이었다. 또 산행하노라면 암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 자연스럽게 산에 몰입해 스트레스가 날아가 버려 암에 가장 좋은 치료약이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일주일에 산을 4~5일을 오를 정도로 미쳐서 산만 다녔다.

“2004년에 1,000개 산을 탔고 2006년에 2,000산, 2008년에는 3,000산을 넘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암이 나은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첫째는 간절히 기원한 것이고, 둘째는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비운 것입니다. 산행을 하면 마음을 비울 수 있어 좋습니다. 셋째는 산행을 하니 자동으로 음식 조절이 되서 그렇습니다.”

그는 암을 극복하며 산행을 하는 동안 마음이 훨씬 평화로워졌다고 한다. 산행을 하며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욕심을 버리는 방법을 터득한 것이다. 문정남씨는 “남을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고 이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다”며 산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등산 이외에 다른 일은 안 해요. 내 생명을 연장시켜준 게 산이고, 산이 내 모든 희망입니다. 딴 데 신경 안 쓰고 다른 욕심도 없으니까요. 어쩌다 이틀 연속 쉬면 산에 가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요. 그러다 산에 들어서면 어머니 품에 왔구나 하며 마음이 편해져요.”

그는 암을 치료하는 10여 년 동안 산을 떠나본 적이 거의 없다. 수술이 성공적이었기에 암을 치료할 수 있었지만 그는 등산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산은 암을 고친 만병통치의 명의”라고 그는 말한다.

등산 통해 고혈압 치유하고 뚱보에서 날씨한 몸매로 변신한 박병욱씨

“좀더 일찍 산을 알았다면 더 멋진 인생 살았을 것”

 
박병욱(朴炳旭·45·가든플라워 대표)씨는 산을 통해 건강뿐 아니라 세상을 되찾았다. 젊은 날 그는 먹고사는 일에 그야말로 목숨을 걸었다. 대학 졸업 후 남들처럼 직장에 몸을 담은 그는 곧 ‘이게 아니다’ 싶었다. 1년쯤 다니다 새로운 직장을 찾던 중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인천시립도서관에서 자료를 찾다가 외국 잡지에 실린 꽃시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 무엇보다 생활 수준이 높아지면 꽃을 필요로 하는 인구가 는다는 대목이었다.

6개월에 걸쳐 전문서적도 보고 시장조사를 하는 등 연구를 했다. 그리곤 20개월간의 수업을 시작했다. 꽃집 직원 생활이었다. 계획한 대로 20개월이 되던 날 남의 집 살이를 그만두고 결혼한 그는 이듬해인 1995년 1월 ‘목림화원’이란 이름의 꽃집을 차렸다. 꿈에 부푼 그는 밤 10시까지 꽃가게를 지키며 꽃도 만지고 배달도 직접 다녔다가, 가게문을 닫기 무섭게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꽃시장으로 달려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새벽 4시. 침대에 드러누울 때마다 온몸이 푹 꺼져드는 기분이 들곤 했다.

사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도 찾아왔다. 2001년, 이미 4년 전 인터넷 상에 문을 연 온라인 꽃가게 가든플라워와 그가 7년 가까이 해온 오프라인 목림화원의 만남이었다.

가든플라워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온라인 꽃가게가 막 태동하던 시절인지라 경쟁상대가 별로 없어 고객이 빠른 속도로 확보되는 등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절이었다. 그런데 몸이 뭔가 불편해졌다.

“먹는 걸 무척 좋아했어요. 꽃가게 하는 동안 가게문을 닫고 서울 강남고속터미널 꽃시장에 가면 출출하니까 꼭 뭔가를 먹었어요. 새벽에 집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술은 나한테 맞지 않는다 싶어 진작 끊었지만 담배는 엄청 피워댔어요. 하루에 세 갑씩 폈으니까요.”

“산에 다니며 건강해지니까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어요”

가끔 어지럽거나 머리가 무거웠다. 숨도 찼다. 가슴까지 아파 왔다. 건강의 적신호였다. 병원을 찾았다. 110~160의 고혈압이었다. 아차 싶었다. 모친께서 뇌경색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해오는 등 가족병력이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것.

“혈압도 나쁘고 혈관계통이 전반적으로 나쁘다는 진단을 받았어요. 의사가 고혈압 약을 처방해 주면서 가벼운 운동으로 몸무게를 줄이라고 했어요.”

처음 한 운동은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을 하루에 10바퀴씩 도는 것이었다. 욕심을 냈다. 인천에서 강남구 역삼동 뱅뱅사거리 부근의 회사로 출근하기 전 청계산을 찾았다. 처음엔 숨이 차고 머리가 아파 20분 걷고 돌아서야 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3일쯤 지나 또 청계산을 올랐다. 이번엔 25분 올랐다 내려오고, 그 다음엔 30분 이렇게 차츰차츰 거리와 고도를 높였다. 이렇게 1주일에 두세 번씩 청계산을 찾은 박병욱씨는 3개월쯤 지나 매봉에 처음 올라섰다. 청계산을 찾기 전까지 산이라면 바라보는 것으로만 생각해 왔던 그가 처음 올라본 정상이었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생겼다는 게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 석 달 동안 체중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혈압도 잘 조절되어 가고 있었다. 의사도 처방대로 잘 하고 있다며 격려를 해주었다. 체력이 점점 나아지자 욕심을 냈다. 제물포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고교 동창회원들끼리 나서는 산행에도 참가하고, 모집산행을 통해 원거리 산행에도 나섰다. 지난해 7월부터는 당일에 10시간 이상씩 걷는 산행을 기본으로 삼는 제인악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한 달에 한두 번씩 정기산행에 참가하고 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산에 다닌 지 1년쯤 지나 혈압약을 반으로 줄이게 되었고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4분의 1로 줄이게 되었어요. 체중도 80kg대로 내려가더니 점점 줄어들었고요. 물론 엄청나게 좋아하던 야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어요.

생활을 엄격하게 했으니까요. 3년쯤 지나니까 의사 선생님이 이젠 혈압약을 안 먹어도 된다고 하는 거예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물론 몸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어요. 체중이 68kg으로 떨어졌고 허리는 30인치로 줄어들었어요. 그 전에 입던 옷을 싹 바꿨으니까요. 아깝다니요. 몸이 무겁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을 모를 거예요. 지금은 날아다닐 것 같아요.”

박병욱씨는 9년 동안 산에 다니는 사이 300개 산 이상 오른 것 같다고 한다. 그는 그간 지리산 무박종주와 화대종주는 물론 지리산 천왕봉만 해도 14번이나 올랐다. 이렇게 등산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니까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고, 업무 효율도 상당히 좋아졌다고 말한다.

“허리 둘레가 조금 굵기는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요. 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서 만들어진 근육일 테니까요. 요즘도 한 달에 두 번은 꼭 장거리 산행을 해요. 자영업을 하는 관계로 시간이 있어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전국의 산을 찾고 있어요. 주말이나 일요일에 산에 못 가면 주중에 꼭 가니까요. 산이 저를 도와준 걸 생각하면 너무 고마워요. 그래서 산에 가면 늘 겸손해져요. 그런 산을 평생 함께하고 싶어요.”

백운대 100회 등정으로 좌반신장애 극복해낸 박철규씨

“청소년기에도 없던 삶의 뜨거운 열정을 북한산에서 찾았습니다”

 
“백운대를 백 번 오르는 사이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박철규씨(朴喆圭·49·재현고 교직원)는 좌반신장애인이다. 그는 젊은 날 우울한 삶을 살아왔다. 머릿속이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런 그의 삶을 바꿔준 게 바로 산이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박씨는 고교 입시를 남겨놓은 시점에서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

“수업을 마치고 열차를 타려고 구포역으로 달려가다 넘어졌어요. 겉으로 아무 이상이 없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죠. 그런데 3일 뒤 갑자기 쓰러졌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20일이 지난 뒤였어요. 몸 한쪽이 움직여지지 않는 거예요. 머리를 레일에 부딪히는 순간 뇌진탕이 일어났던 거예요.”

이후 좌반신장애가 온 그는 2급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모든 게 힘들었다. 17세 되던 해에는 영도다리에서 바다로 뛰어내렸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모터보트가 순식간에 달려와 그를 낚아채 다시 땅으로 올려다놓았다. 이렇게 절망과 비관이 반복되는 가운데 세월은 흘러갔다. 그가 새 삶을 시작한 것은 서울로 거처를 옮기고 1977년 이영득씨와 결혼한 뒤였다. 강북구 수유동 북한산 자락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박철규씨는 아내가 많이 이해해주었으나 가장노릇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게 늘 가슴 아팠다. 첫 아이 종국이가 태어나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그 무렵 독지가가 나타났다. 불암산자락에 위치한 재현학원 이사장이었던 고(故)이익엽씨는 사정이 딱한 그를 교직원으로 채용해 주었다.

1981년 재현중고교에서 교직원 생활을 하면서 모든 게 안정돼 갔으나 67kg에 불과하던 날렵한 몸이 84kg으로 불어나는 등 건강이 나빠졌다. 1989년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집 근처 약수터를 찾아 다녔다. 같은 동네 사는 동료 교사들의 도움으로 시작해 8년 가까이 거의 매일 약수터를 찾던 그는 1997년 4월 1일 큰 목표를 세웠다. ‘대동문 등정’이었다.

우선 4·19묘지에서 대동문까지를 목표로 삼았다. 정상인에게는 1시간 거리지만 그에게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험로였다. 새벽녘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온 그의 몸은 나무에 긁히고 바위에 부딪쳐 온몸이 엉망이었다. 그래도 태어나서 처음 맛본 성취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며칠 뒤 목표를 높였다. 대동문에서 용암문까지 능선을 탄 다음 도선사로 내려오는 것이었다. 그 목표를 달성하자 목표를 또 높였다. ‘백운대 등정’이었다.

오른손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그에게 백운대 바윗길이 문제였다. 젊은이들이 해결해 주었다. 배낭을 대신 메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었다. 백운대 밑에서 나이 먹은 이들이 말릴 때는 그 역시 머뭇거렸지만, 한 발 한 발 오르다 보니 점점 힘이 솟았다. 결국 그는 한 손과 한 발로 백운대 정상에 올라섰다. 너무나 기뻤다. 그 모습을 본 정상기념메달 장사가 “백 번만 올라오면 기념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격려했다. 그 2년 3개월 뒤인 1999년 7월 4일 그는 메달 장사에게 보란듯이 백운대 100회 등정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그 사이 84kg 나가던 몸무게는 71kg으로 줄어들고 오른쪽 장딴지는 두 배 이상 굵어졌다.

박철규씨는 도보산행에 만족하지 않았다. 백운대 100회 산행을 한 달쯤 앞두고 설악산 단독산행에 나섰던그는 이후 판에 박인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에 지리산도 오르고 눈 쌓인 한라산도 올랐다. 백운대 등정 목표를 달성한 이듬해 봄에는 일반 등산뿐 아니라 캠핑에 이어 암벽등반에 이르기까지 6주간의 등산학교 교육을 무사히 마쳤다. 북한산 백운대와 노적봉을 비롯해 만장봉으로 이어지는 암벽등반이 그에게 쉬울 리 없었다. 힘없는 왼쪽 발이나 손이 크랙이 끼어 빠지지 않으면 당황하고, 하강 중 로프가 빠지지 않아 가슴 철렁했던 적도 있으나 인수봉 야간 등반까지 이어지는 암벽등반 교육도 무사히 해낸 것이다.

“대슬랩을 올라설 때 과연 해낼 수 있을까 두려웠어요. 묘하더군요. 조금씩 올라가니까 자신감이 생기고 다리에 힘도 더 들어가는 거예요. 10년이 지났는데도 그 순간이 선해요. 어찌나 기뻤던지 인수봉 정상에 올라서는 순간 바위에 엎드려 입을 맞췄으니까요. 그 후 한 번 오를 때마다 헬멧에 붙인 별딱지가 26개나 되요.”

박철규씨는 암벽등반에 재미를 붙였으나 인수봉 B코스 등반 중 15m나 추락하고, 또 동료 산악인들이 한 손을 쓰지 못하는 그를 끌어올리느라 애를 쓸 때마다 미안한 마음에 들어 몇 해 전부터 바위는 거의 찾지 않고 있다. 대신 도보 산행으로 즐거움을 찾는다.

“3, 4년 전에도 10여m를 떨어진 적이있어요. 확보자 실수였지만 끌어올리느라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미안한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어쩌다 한 번 가요. 대신 비박이나 도보산행을 즐겨요. 언젠가 설악산 둔전골을 거슬러 올랐다가 화채릉을 거쳐 염주골로 내려선 적이 있어요. 그때 왜 염주폭인지 깨달았어요. 빗방울이 염주처럼 떨어져 얼굴을 때리고 입으로 들어가지 뭐예요. 한여름에 그런 추위는 처음이었어요. 좁은 공간에 17명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능선을 세 개 넘어 탈출했어요. 이튿날 대포 횟집에 가서 보니까 발톱이 새카맣게 죽어 있더군요.”

박철규씨는 “그 산행에서 젊은 시절에도 경험해 보지 못한 뜨거운 감동을 맛보았다”며 “이후 6번이나 같은 코스를 찾았다”고 한다. 퇴직 직후인 재작년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트레킹을 다녀온 그는 요즘도 산 다니는 재미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고소증 때문에 도중에 포기했어요. 요즘은 비박 산행을 즐겨요. 안 다녀본 산 위주로 다니고요. 사진 찍는 재미에 카메라도 새로 장만했어요. 아무도 없는 산마루나 바위 조망대에 앉아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아는 사람들에 보내며 자랑해요. ‘밤하늘에 별이 가득 찬 이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줄 아냐’면서요. 남들이 장애인이라 말하지만 저는 제가 장애인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도 마음 내키면 조선팔도 어디든지 가요. 이 모든 게 산에 다녔기 때문에 생긴 자신감과 즐거움이에요. 북한산은 은인이에요.”

박철규씨는 “산을 통해 건강과 자신감을 얻었지만 그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깨달은 게 더욱 큰 것”이라고 말했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등산인은 산을 다니면서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되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저는 매사에 짜증스럽고 회의적이었어요. 지금은 달라요. 모든 게 환하고, 모든 게 소중해요.”

 

허리 디스크와 위궤양·시력저하를 등산으로 이겨낸 변동주씨

해군 대령 퇴임 후 찾아온 위기, 산에서 해법을 찾다

“지방에서 33년간 직업군인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 본가에 돌아와 사회생활을 하려니, 가정이나 사회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15년 동안을 진해에서 혼자 살았지요. 합가하니 아내는 아내대로 자기 생활이 있어 익숙해지기가 어려웠어요. 사회는 군대와는 양상이 전혀 달라 적응하는 데 몇 년 걸렸지요.”

변동주(73)씨는 해군 대령으로 예편했다. 해군사관학교 축구부 주장을 했을 정도로 운동을 잘했고 열정도 컸다. 해군 출신이라 바다를 좋아할 것 같지만, 해상근무만 10년을 해서 “바다는 아예 지긋지긋하다”며 스스럼없이 말한다. 보통은 해상근무 5년 정도가 관례인데, 그는 소위 ‘빽’이 없어 10년을 근무했다고 한다. 덕택에 그 청렴함을 인정받아 해군감찰반에 근무하며 암행어사 같은 역할을 했었다고 한다. 1986년 퇴임 후에는 해군 정비창 공장장으로 부임해 1994년에 퇴직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1,000여 개의 산을 올랐다고 한다.

고령에도 만능 스포츠맨에 꾸준한 운동으로 근육질의 몸을 유지하고 있었던 그였지만 퇴임 후 환경이 바뀌자 몸은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했다. 일상생활에 적응이 안 되다 보니 제일 먼저 고장 난 것은 눈과 위였다. 스트레스로 인해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쓰게 되었고, 위궤양과 허리 디스크가 동시에 찾아왔다. MRI 촬영 결과 허리척추 3번과 5번 디스크 판정으로 수술을 예약했다.

“수술할 날짜까지 다 잡아뒀는데 친하게 지내던 신경외과 의사가 디스크는 수술을 하면 재발 가능성이 많다고 절대 수술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면서 등산을 권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집에서 가까운 남한산성을 시작으로 그는 북한산, 도봉산 같은 근교산 위주로 부지런히 올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자 “위장이 완치되고 안경 벗고 산행을 해서인지 눈도 맑아지고, 펴지도 못할 정도로 안 좋았던 허리의 통증이 싹 없어졌다”고 한다. 그는 이 모든 걸 등산의 효과로 여긴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거의 일주일에 3일은 산에 갑니다. 오랫동안 피우던 담배를 몇 년 전에 끊었어요. 산행 시작해서 몸이 풀리려면 60대에는 30분, 70대에는 1시간은 지나야 몸이 풀렸는데 담배 끊고 나서부터는 30분만 땀 흘리면 숨도 안 차고 오래 걸어도 지장이 없어요. 폐활량이 좋아져서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대령으로 예편한 군인 출신답게 변동주씨는 산행 시작 전에는 늘 준비운동을 하고 산에서 먹을 음식도 손수 준비한다. 꿀을 넣어 갈아 만든 생과일주스와 온갖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특제 샌드위치가 그것이다. 일행들의 도시락도 손수 준비하며 본인이 운전해 일행들을 산에 태워주기까지 한다. 이에 대해 그는 “나이 들어, 베풀고 사는 게 낙”이라며 “산에 가면 잡념이 없어지고, 그렇게 좋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는 나이에 걸맞지 않는 장거리 산행도 무리 없이 소화해 왔다.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등산이 벌써 15년이 넘었네요. 그동안 1,000개 산을 돌파했으니 산이 내 인생을 바꿔놓은 셈입니다. ‘재산을 잃으면 작게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라는 말처럼 건강하게 사는 게 제일 행복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 열심히 산에 가는 게 오래 살려는 게 아니에요. 건강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 겁니다.”

변동주씨는 지금도 허리 디스크가 완치된 건 아니다. 그러나 나름의 허리근육 강화 운동을 개발해 끊임없이 땀방울을 흘린 끝에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고, 지금도 산행과 허리운동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1년에 두 번씩 건강검진을 하고 있는데 73세라는 나이에도 혈압이나 당뇨가 전혀 없고 등산을 시작한 이래 감기에 걸린 적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월간산>을 비롯한 여러 등산잡지를 10년 넘게 정기구독할 정도로 등산마니아인 그는 “전에는 책에 나온 좋다는 산은 전부 다니고 무명산 개척산행도 하고 장거리 종주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나이가 있어 서울 근교산행 위주로 하고 있다. “이젠 산에 안 가면 몸이 아프니, 산에 갈 수밖에 없다”는 변동주씨다.

바위의 기운으로 말기암 극복한 이만방 숙명여대 교수

“바위에 매달려 있을 때의 집중력과 땅의 기운이 저를 살렸습니다”


 
이만방(李萬芳·65·숙명여대 작곡과) 교수는 대한민국 국제음악제는 물론 타 국제음악제에서 여러 차례 입상한 바 있고,‘세계음악사’에 기록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작곡가다. 정년을 몇 달 앞두고도 국내외 음악 강좌 때문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는 한때 건강 때문에 좌절할 뻔한 적이 있다. 독일 국가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독일에서 음악 공부를 마친 뒤 1983년부터 숙명여대 음대에 재학해 온 이만방 교수는 음악계에서 승승장구하던 1995년 여름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석 달간의 연주여행 스케줄에 맞춰 미국 샌프란시스코 음악제에 참가한 그는 짬을 내어 미국에서 사는 누나 집을 방문했다. 혈색이 좋지 않은 동생의 건강을 걱정한 누나의 권유로 받은 건강검진에서 위암 진단이 나왔다. 내시경수술로 떼어낸 암세포로 조직검사를 한 결과 수술한다 해도 2년밖에 살 수 없고, 그것도 가능성이 20%밖에 안 된다는 진단이 나왔다.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요세미티에 갔어요. 엘캐피탄을 마주하는 순간 울컥해졌어요. 아내와 딸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착잡해졌고요. 죽는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멀쩡해지면 엘캡이나 하프돔을 실컷 올라야겠다고 다짐했으니까요.”

1995년 9월 15일 수술을 마친 뒤 100일 되던 날 귀국한 이 교수가 거울 앞에 섰을 때 그의 모습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유태인 같았다. 하루하루 불안했다. 수술 부위가 터질까 염려스러워 볼펜을 집을 때에도 조심했다. 죽음에 대한 상상을 떠올릴 때면 괴로웠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느니 좋아하던 산이라도 실컷 다녀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었다.

1996년 말 구기터널에서 비봉까지 올랐다. 1시간이면 오르던 비봉이 4시간이나 걸렸다. 온몸에서 시체 썩는 듯한 냄새가 났고, 지나가는 등산객이 걱정할 만큼 얼굴이 창백했다. 이듬해 2월에는 하산 길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119구조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그는 산행을 멈추지 않았다. 수술 당시 주치의가 예견한 생존기간을 반쯤 남겨놓은 1996년 봄 북한산 산길을 오르던 이 교수는 더 큰 결심을 했다.

“인수봉 의대길을 오르는 클라이머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어요. 그 때 결심했어요. 1년 뒤 죽을 확률이 2,000%가 넘는다 해도 꿈을 꼭 실현해야겠다고.”

항암치료가 막 끝난 1996년 6월 8일 북한산 수리봉 기슭에 다가섰다. 텐트 한 동을 쳐놓고 아침부터 해 질 때까지 바위에 매달려 살았다. 식량이 떨어질 때 외에는 집에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너무 지독하게 바위에 집착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수리봉 한 대장’이라 불리는 고(故) 한중희씨가 다가와 “꾸준히 오래 할 건지 아니면 짧고 화끈하게 할 건지 알아서 잘 결정하라” 충고해 주었다.

“1980년대 중반 산에서 만난 노인한테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어요. 건강을 위해 막 산을 다니기 시작할 때였어요. 꼭 육상선수들 훈련하듯 산행하는 제 모습에 ‘산과 원수 졌느냐, 자연에 빠지기도 하고 산과 대화를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고 충고를 해줬어요. 한 대장 말대로 마음가짐을 바꾸니까 암벽등반이 재미있어졌어요. 즐거운 마음으로 바위를 타니까 암 환자라는 사실도 잊게 됐고요. 의대길 꿈은 석 달 만에 이뤘어요. 하루에 세 코스를 등반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도 좋아졌고요. 모르실 거예요. 오줌이 찔끔찔끔 나오는 줄도 모르고 지내다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랫배가 불끈해 오는 기분을 말이에요. 그때부터 삶에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죠.”

1998년 암벽등반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코오롱등산학교를 나온 이만방 교수는 2003년 톱로핑 하강을 하다 확보자가 로프를 제대로 잡아주지 않는 바람에 무려 20m나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한 달간 치료를 받았고, 이후 2년간 음대학장으로 지내는 동안 업무에 바빠 흐트러진 몸을 다듬기 위해 실내암장에서 운동을 하다 어깨근육이 파열돼 6개월쯤 산을 다니지 못한 적을 제외하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암벽에 몰입하며 지내왔다. 단지 3년 전 또다시 확보 때문에 사고를 당한 이후 선등은 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2년 전 아끼던 장비를 후배들한테 나눠주었어요. 장비를 가지고 있으면 자꾸 선등 서려고 욕심낼 것 같아서요. 지금도 암벽등반을 통해 암을 이겨냈다고 확신해요. 텐트에서 지내는 사이 땅에서 좋은 기운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집중을 통해 암을 이겨낸 것 같기도 하고요. 등반할 때 몇 센티미터 떨어진 홀드를 잡으려면 엄청 집중해야 하잖아요. 그런 몰입의 순간이 반복되는 사이 독한 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키워졌던 것 같아요. 땀을 흘리는 사이 몸 안의 나쁜 기운을 밖으로 빼낸 것 같고요. 그래서 암으로 고생하는 분이 있다면 지금 당장 바위로 달려가라고 권하고 싶어요.”

이만방 교수는 “병을 앓고 나서부터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고, 음악뿐 아니라 가족과 아내, 나와 친지들 그리고 친구와 주위 환경 모든 것이 하늘의 은혜임을 알게 되었다”며 “이 또한 산을 통해 건강을 회복했기 때문에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허리 디스크와 신경성 두통 등산으로 치료한 정정선·이향순씨 부부

“울릉도에서 성인봉을 오르며 새로운 삶 찾아”

 
“약국을 차려도 될 정도로 여러 종류의 약으로 넘쳐났죠. 저는 허리 디스크 협착증 판정을 받았어요.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해보고 차도가 없으면 수술을 받자고 해서 하루 걸러 허리와 무릎에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아내는 신경성 두통과 위염으로 약을 달고 살았고요.”

정정선(62)씨는 직장 생활 38년을 출·퇴근하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단조로운 일상생활로 보냈다. 벗어나고픈 마음은 있었지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랜 직장생활로 남은 건 디스크 협착증과 관절염이었고 그의 부인 이향순(50)씨도 신경성 두통과 위염으로 몸과 마음 모두 말이 아니었다. 이때 전화위복처럼 일상에서 탈출할 기회가 주어졌다. 교직에 몸담고 있었는데 울릉도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울릉도는 경사가 심했다. 집에 올라가는 길도 20도는 충분히 되는 오르막이었다. 집에서 오르내리는 길도 힘들었기에 등산을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서 산에 나물을 캐러 가게 되었다. 막상 산에 가서는 흐드러진 나물에 취해 허리 아픈 줄도, 다리가 아픈 줄도 모르고 산을 헤집고 다녔다. 그날 저녁 통증이 심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편안하게 잠을 잤다. 이후 몇 번 나물을 캐러 다녔지만 아프다거나 병이 더 도진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이들은 부부가 늘 함께 산을 올랐다. 덕택에 부부 금실도 좋아졌다고 한다.

“우리 부부는 산행 할 때 서두르지 않아요. 오르막길은 힘 있게, 내리막길은 천천히, 평지는 한결같은 보조로 느긋하게 걷죠. 나무에 눈을 맞추어 대화도 나눠 보고 풀과 꽃의 향기에 취하면서 개울물이 있으면 발을 담그며 도란도란 살아온 날을 이야기하다 보면 부부의 정이 오롯이 살아납니다.”

자신감을 얻은 정정선씨는 이사한 지 몇 개월 지난 2007년 5월, 성인봉을 오른다. 성인봉의 시원한 경치와 걷는 맛에 빠진 정씨 부부는 악천후를 제외하고는 사계절 매주 성인봉을 올랐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3년째 접어들자 관절염이 심했던 무릎과 통증으로 제대로 펴기도 힘들었던 허리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 체중도 점차 줄어들어 지금은 10kg을 감량했다.

부인 이씨도 두통약과 위장약을 먹지 않는다고 한다. 무릎이 부은 상태로 울릉도에 들어왔는데 부기가 다 가라앉았다고 한다.

“산행에 매료되다 보니 우리 부부는 가지고 있던 병을 모르고 생활했습니다. 아픈 줄도 모르고 약 먹는 것도 잊어버렸지요. 더 이상 물리치료를 받거나 약을 복용하지 않아요. 공기 좋고 물 좋은 울릉도에서 한 등산이 바로 만병통치약이었어요.”

정정선씨 부부는 울릉도에서 생활한 지 4년이 되었다. 이미 정년퇴임을 했지만 울릉도가 좋아 그대로 눌러 살고 있다.

맨발 등산 6개월 만에 협심증 고친 정태륭씨

“일반 산행에 비해 두 배 이상 효과 있다!”

 
정태륭(鄭泰隆·66)씨는 지병이던 협심증을 등산을 통해 고쳤다. 특이한 것은 그가 선택한 산행 스타일이 맨발이라는 점이다. 맨발 보행이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식이다. 맨발로 흙길을 걷다 보면 병세가 호전되는 것은 물론 전체적인 신체의 컨디션까지 좋아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씨는 산책 수준 이상의 고강도 산행을 맨발로 즐기는 독특한 등산광이다.

“건강한 체질인 데다 글을 쓰는 직업이라 젊었을 때는 술과 담배를 많이 했던 편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습관적으로 지내다 보니 몸에 이상이 왔습니다. 비만은 기본이고 허리 디스크, 불면증 등 여러 가지 질병이 한꺼번에 닥쳤습니다. 가장 심각했던 부위가 심장으로, 협심증이 심해 잦은 통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1995년, 그는 맨발 등산을 시작하며 오랫동안 고통받던 만성질병에서 빠져나오는 탈출구를 찾았다. 그가 맨발 보행을 시작한 계기는 의사의 권유 때문이었다. 발은 ‘제2의 심장’이라는 별명을 지닐 정도로 혈액을 심장에 되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발바닥에는 인체의 모든 신경망이 집결돼 있어 발바닥을 자극하면 면역이 강화되어 자연치유력이 높아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정씨는 맨발 보행을 시작하며 지병이던 협심증이 완전히 치유됐고, 거의 동시에 위궤양, 디스크 수술 후유증에 의한 통증과 불면증, 변비 등 고질병들이 사라졌다. 망가졌던 몸이 건강했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집 근처의 관악산산림욕장에서 맨발 걷기를 시작했어요. 몸이 온전치 않으니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죠. 무리하면 오히려 독이 된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조금씩 거리를 늘려갔습니다. 하지만 맨발로 산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어요. 발바닥이 아파 조심스럽게 걷다 보니 쉽게 피로를 느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적응이 됐고, 6개월 만에 협심증으로 인한 가슴 통증이 사라졌어요. 병원에서 검사를 해보니 거짓말처럼 병세가 좋아졌습니다.”

그는 맨발 보행의 효과에 고무되어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산림욕장을 벗어나 관악산을 넘나드는 코스를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바위가 많은 험한 코스를 맨발로 걷는 일은 많은 위험이 따른다. 처음에는 돌출된 돌과 나무뿌리에 찍혀 상처를 입는 일도 잦았다. 엄지발톱이 성할 날이 없었고, 심지어 통째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위험도 그를 막지 못했다. 건강을 되찾고 유지하는 비법으로 맨발 등산이 최고라는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산을 오르는 것 자체가 건강에 큰 도움이 되지만, 맨발 등산은 평범한 등산보다 운동효과가 두 배는 될 것입니다. 혈액 순환을 왕성하게 하고 오장육부의 건강을 돕습니다. 두통이나 변비로 고생하는 분들은 곧바로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남성의 경우 발기부전의 치료효과가 놀라울 정도로 두드러집니다. 맨발 등산이 주는 효과는 이처럼 무궁무진합니다.”

맨발 등산의 좋은 점은 이미 여러 사람의 체험을 통해 널리 확인됐다. 하지만 아무나 도전할 수 없는 것이 맨발 등산이다. 등산화를 착용할 때와 비교하면 같은 코스를 가도 산행강도는 1.5~2배에 달한다. 그만큼 힘이 든다. 걷는 동안 언제나 긴장해야 하고, 시간이 지나면 발바닥의 통증도 점점 심해진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맨발을 피하게 되는 원인이다.

“건강에는 큰 도움이 되지만, 맨발 등산은 발을 다치는 위험이 높은 것이 문제죠. 게다가 미친 사람 보듯 하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따갑습니다. 그래서 발바닥만 드러나게 만든 전용 등산화를 개발해 특허까지 출원했어요. 부상 방지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요즘도 그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일주일에 몇 번씩 관악산 등에서 맨발 등산을 즐기고 있다. 그는 “인간의 발은 흙길을 걷는 데 알맞게 진화된 신체 부위”라면서, “맨발로 걸으면 발과 흙이 자연스럽게 교감하며 누구나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정태륭씨는 1944년 인천 출생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소설가다. 지금까지 그는 <인간면허>, <사냥시대> 등 7권의 소설집을 출간했다. 최근 그는 근대사에 기초한 작품을 집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