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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막이 멈춘 곳엔 부선운산 감각이 녹아내리는 감미로운 바위 속으로 서진 무덤이 있었다. 삼인종합학습원에서 출발해 걸은 30분의 산길도 부서진 무덤 같은 길이었다. 오래 전에 잊혀진 산인 듯 수풀과 잔가지들로 가득하다. 희미한 길은 어디가 길이며 어디가 숲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도 있었다. 풀이 적은 가을에 와서 그나마 다행이다.
“종주꾼들만 다니는 길이에요. 이쪽 코스는 관리소에서 오염되지 말라고 정비를 안 했어요.”
- ▲ 병풍바위에서 본 아산면 일대. 이상근(왼쪽)씨와 안명선씨가 막바지 단풍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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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의 토박이산꾼 조기남(66)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동행한 웨딩플래너 안명선(36)씨와 일어통역사 이상근(38)씨가 쓰러진 나무를 요령 있게 피하며 산을 오른다. 올해 쓰러진 나무부터 몇 년 전 태풍에 쓰러진 것까지 죽은 것들도 연배가 있다고 조씨가 알려준다. 처음 만나는 봉우리는 형제봉. 두 개의 봉우리라 이름이 그렇다. 표지기가 몇 개 붙어 있고 트인 풍경은 없는 4평의 작은 공간이다.
노적봉은 경치 없고 빽빽해 신경 쓰지 않으면 봉우리임을 모르고 지나칠 만하다. 조릿대의 왕국이지만 한 명이 걸어갈 정도의 아량을 베풀어, 산행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일행은 벌써 한숨을 내쉰다. 절정의 가을을 기대했지만 쓰러진 나무와 지저분한 등산로, 경치라곤 없는 야산 분위기다. 오르내림도 만만찮아 제법 땀을 뺀다. 온종일 이걸 반복한다고 생각하니 한숨이 먼저 나온 것이다.
- ▲ 절정의 조망과 단풍을 뽐내는 안장바위 산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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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풍경은 탕건바위가 선사한다. 숲 속 두꺼비처럼 눌러 앉은 바위다. 뒤에서 올라서니 아산면의 논과 산이 훤하다. 길이 좁아선지 못 느꼈는데 여기서 보니 산을 수놓은 단풍의 결이 색동옷처럼 보기 좋다. 구황봉엔 돌담의 흔적이 있다. 문화해설사이기도 한 조기남씨에게 산성이냐고 묻자, 무덤이란다. 관리는 안 돼 있으나 비석도 있고 크다. “동네에서 좀 살았던 집안의 무덤”이란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다.
구황봉에서 없었던 조망을 아래의 마당바위가 속 시원히 갚는다. 병이 거꾸로 땅에 박힌 듯한 병바위는 평야에 솟은 기암이라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다. 가야 할 능선 언저리엔 선바위가 초록 사이로 뿔처럼 혼자 뾰족하게 솟아 재미있는 경치다. 인경봉과 구황봉 사이 안부에서 하산길처럼 보이는 왼편으로 향한다. 사방으로 희미한 길이 나 있어 그냥 걷다간 잘못 들기 딱 좋은 요주의 지점이다. 조기남씨 덕택에 고민 없이 따른다.
- ▲ 탕건바위에서 본 노적봉과 형제봉 추경. 절정의 단풍이 화사하게 산을 치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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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바위산 선운산에 온 게 실감난다. 안장바위 위다. 고도감 있는 바위 꼭대기라 찬란한 경치다. 가야 할 줄기에 더 큰 바위능선이 있어 지체 없이 떠난다. 용머리를 닮은 바위도 불쑥 솟았고 기암괴석이 곳곳에 끓어올랐다. 안장바위니 병풍바위니 하는 이름이 있지만 산 아래 마을에서 봤을 때 그리 보인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산행하는 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바위가 능선 일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커서 그렇기도 하다.
병풍바위 위가 진짜 풍경이다. 선운산에서 제일 큰 저수지인 도솔제가 차분하게 반짝이고 주위로 컬러풀한 산등성이가 한껏 멋을 냈다. 사람들이 내장산에서 단풍 축제를 여는 사이 산신들은 선운산에 모여 고요한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더 가니 두꺼비 등짝처럼 까칠한 바위가 광장처럼 널찍하다. 공처럼 둥글어 앞에 가는 사람이 바위 아래로 잠기는 것처럼 보인다. 미니 지구본 위에 서 있는 듯 특이한 터다.
- ▲ 안장바위 능선에서 본 선운사. 축제가 열리는 잔칫집처럼 화사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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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암괴석처럼 산줄기도 변덕스럽다. 곧게 이어지지 않고 성질부리듯 옆으로 휙 틀었다가도 하산할 것처럼 확 가라앉았다가 서곤 한다. 주능보다 더 높게 지능선을 곧추세운 곳도 많아 지형이 꽤 독특하다. 독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200m대를 오르내리다 비학산에서 처음 300m대를 돌파한다. 제법 시간을 투자한 오르막이지만 반기는 건 수풀에 뒤덮인 헬기장과 쓰러진 나무들이다. 능선이 하산길처럼 뚝 떨어진다 싶더니 희어재에서 고도는 100m대로 떨어진다. 들머리에서 산을 다시 타는 것 마냥 솟은 쥐바위봉 줄기다. 반가운 건 반듯한 사거리 이정표다. 이제부턴 정비된 길에 선명한 이정표가 안내하는 고속도로다. -
무수한 봉우리들을 속보로 해치워버리겠다는 욕심을 버리자 축지법을 쓴 듯 길이 짧아진다. 능선 왼편은 아찔한 절벽으로 변한다. 주능에 올라서자 다시 절벽 전망대다. 산이 낮은 탓에 733번도로를 지나는 트럭 엔진 소리까지 생생하다. 사람 사는 땅은 볼 게 없지만 걸어온 줄기를 바라보면 다 내 땅인 양 든든하다. 땀을 주고 정직하게 산 내 산줄기다. 이 맛에 꾼들은 장거리 종주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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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속 시원한 경치를 선사하는 구황봉 아래의 마당바위. 아산면 일대의 추경이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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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머의 산줄기인 투구바위능선 갈림길을 지나 쥐바위봉에 서자 또 바위 전망대다. 이젠 지겹다. 화창한 날인데도 서해 바다가 보이지 않는 건 짙은 스모그와 황사, 안개 같은 것이 겹쳐서다. 중국에서 오는 구질구질한 기류 덕택에 근래 서해쪽 산에서 맑은 날에도 시야가 깨끗하게 트인 적이 없었다.
청룡산에선 북쪽으로 뻗은 선운산 줄기가 볼 만하다. 제일 눈에 띄는 건 바로 앞에 솟은 배맨바위다. 부두에 배를 매는 바위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렇다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괴상한 바위모양에 눈길이 간다. 가까이서 보니 미술 실습할 때 쓰는 석고상 중에서도 남성적인 선의 브루투스를 닮았다. 사람이 다니는 길 정면으로 얼굴을 들이댄 것이, 지나는 산꾼들에게 길을 막고 퀴즈라도 낼 것 같다.
- ▲ 1 조릿대와 단풍이 조화로운 노적봉 오름길. 희미한 길이지만 자연미가 좋다. 2 병풍바위 능선을 지나는 안명선, 이상근씨. 우회로가 있어 어려운 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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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계단을 지나니 종주의 끝을 알리는 낙조대다. 맞은편에서 보면 낙조대는 유럽의 바위성처럼 고풍스럽다. 나름 격조 높은 바위덩치다. 낙조대가 왜 낙조대인지는 여기서 직접 노을을 보면 안다. 바위를 붙잡고 올라가 시원하게 볼 수도 있지만 두 개의 바위 조각 사이에서 보면 풍경이 자연 액자 속으로 들어온다. 양편으로 솟은 바위 사이에 노을이 타오를 때의 경치가 예술이다.
- ▲ 1 쥐바위봉 오름길의 기암괴석. 손가락 같기도 하고 개머리 같기도 하다. 2 청룡산에서 본 배맨바위. 부두의 배를 매는 바위를 닮았다 해서 유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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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대에서 하루를 떠나보내며 산행이 끝나는 스토리였으나 색다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종일 바위 줄기를 걸으며 맛난 풍경을 과식해 여간한 풍경은 발길을 멈출 수 없을 거라는 걸 몸은 알고 있었고, 걸음은 빨랐다. 순간 멈춰 세운 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운산이었다. 청자빛을 띤 예스런 바위들이 스스로 기둥이 되어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우리나라의 수묵화로 그려 놓은 듯한 독특한 비경이다. 청송 주왕산의 바위마냥 섬세하고 기찬 솜씨로 만들어낸 조각들, 주왕산의 바위보다 더 작고 아기자기하고 복잡한 모양새다.
사람의 솜씨인 도솔암은 산을 해치지 않는 어우러짐의 경지에 닿았다. 마애불이 있는 암자의 촛불이 멀리서도 뚜렷한 게 신기하다. 융기한 예술품 사이를 색칠하는 건 단풍이다. 빨강, 노랑, 초록, 주황이 감미롭게 뒤섞였다. 어떤 신비로운 붓으로 터치했는지 빨강은 한 가지 색이 아닌 수백 가지 빨강이다. 여느 색도 마찬가지다. 뒤엉킨 건 천상봉과 천왕봉인데 녹아내리는 건 사람이다.
- ▲ 낙조대에서 본 일몰. 암봉 사이로 지는 일몰은 한 폭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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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의도는 없음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더 깊이 찔린다. 달디단 절경이 푹 하고 찔러와 온 몸의 감각이 녹아내리는 것이다. 발길을 옮길 쯤엔 이미 홀린 자의 걸음걸이다. 공원 주차장으로 향하는 달콤한 선운사 4.2km 계곡길, 서정주와 송창식의 동백꽃으로 유명한 숲인 줄 알았는데 단풍도 수준급이다. 지난 주말 내장산은 차들이 8km나 이어졌다는데 선운산은 원하는 만큼의 침묵을 준다. 선운의 가을은 밤새 말 없이 함께 술 마셔 줄 것 같은 시골 여인네다. 시골 여인과 눈 맞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사내가 서둘러 산을 빠져 나간다.
선운산 종주코스 왜 명품 등산로인가?
기암과 숲이 조화로운 풍경, 지겹도록 볼 수 있어
“예쁜 여성 산이에요. 깊이 갈수록 여성의 섬세한 면이 풍기는 곱고 고운 산이지요.”
고창군산악연맹 회장을 20년째 맡고 있으며, 방장산악회 창립멤버인 조기남(66)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창 선운산의 토박이 산꾼이다. 그에게 선운산은 어머니 산으로 통한다. 단순히 고향산이어서가 아니라 “낮고 수려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고, 어디서 오르든 넓은 품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고 해서 그렇단다.
꽃 피는 봄과 단풍이 절정을 이룬 11월 초가 산을 찾기 좋은 시기이지만 낮고 경치가 시원해 겨울에도 부담 없이 산행할 수 있다고 한다. 선운산의 보석 같은 곳으로 낙조대를 꼽는 그는 “낙조뿐만 아니라 천마봉에서 바라보는 기암과 숲의 조화가 기막히다”는 게 총평이다. 토박이 산꾼답게 명산명품 코스로는 일반적이지 않은 코스를 추천한다. 삼인종합학습원을 들머리로 선운산 능선을 종주해 낙조대에서 선운사로 하산하는 코스다. 오르내림이 많고 10km가 넘는 꽉찬 당일산행이라 “산 좀 다닌 사람들에게 추천한다”는 조 회장은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조용한 코스로 정제되지 않은 자연미가 장점이라 한다. 바위 능선 위에서 멋진 경치를 “지겹도록 볼 수 있다”고 자랑한다. 산행 후에는 고창 별미인 풍천장어와 복분자주를 곁들이면 청춘이 돌아올 거라며 농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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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길잡이]
낮다 하여 만만히 볼 수 없는 롤러코스터 산행
한국의 작은 그랜드캐년
삼인종합학습원~구황봉~청룡산~낙조대~선운사 12km
낮지만 만만찮다. 롤러코스터 타듯 오르내림이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산행 초반이 더 만만찮은데, 길이 정비가 안 돼 있어 쓰러진 나무와 넝쿨을 피하며 가야 한다. 수풀이 우거지는 한여름이라면 고행길이다. 희여재까지는 정비된 곳 없이 길은 자연 그대로이고 희미한 곳도 간혹 있다. 형제봉과 노적봉은 별다른 표시가 없으며 조망 역시 없다. 바위 구간은 우회로가 있어 위험한 데는 없다.
길찾기가 관건이다. 관리소에서 정식으로 세운 이정표가 없어 등산지도를 반드시 지참해야 길을 잃지 않는다. 가장 주의할 곳은 구황봉 내려서서 만나는 안부사거리다. 인경봉 방향이 주능선처럼 뚫려 있고 비학산 방향은 하산길처럼 보이는 사면길이다. 병풍바위 지나 비학산 닿기 전, 능선 갈림목에서도 주능선처럼 보이는 지능선 길이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분명한 이정표가 없으므로 지도 없이 걷다간 길 잃기 딱 좋다.
- ▲ 산행들머리인 삼인종합학습원의 조각공원. 지역 작가들의 이채로운 조각품도 볼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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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무성한 헬기장을 내려서면 희여재다. 이후부터는 길이 정비돼 있고 이정표가 곳곳에 있어 고속도로다. 다만 사자바위 능선과 만나는 336m봉에서는 왼쪽 길로 두 번 가야 쥐바위봉으로 이어진다. 낙조대부터는 하산길이지만 도솔암 일대가 기암이 가장 볼 만한 곳이므로 천마봉 언저리에서 충분히 감상하는 게 좋다. 용문굴 갈림길에서 임도를 만나 산행은 끝나지만 버스정류소가 있는 주차장까지는 4.2km 더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장사송, 진흥굴, 선운사 같은 볼거리가 있고 숲이 좋아 지루하지 않다. GPS로 확인한 산행의 실주행거리는 12km, 6시간 정도 걸린다. 단 11월 15일부터 12월 15일까지는 산불방지 입산통제 기간으로, 선운사에서 낙조대를 오가는 코스만 개방한다. 주차료는 1일 1,000원, 문화재관람료는 2,500원이다.
교통 (지역번호 063)
- ▲ 고창의 별미인 풍천장어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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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센트럴에서 고창행 버스가 07시부터 19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운행한다. 3시간 10분 소요에 1만5,300원이다. 고창시외버스터미널(563-3388)에서는 선운사행 직행버스(요금 2,300원)가 1일 8회 (10:00, 11:00, 12:00, 13:25, 14:30, 15:30, 16:30, 17:20) 운행하며 30분 걸린다. 직행버스 외에도 30분 간격(06:20~20:20)으로 운행하는 대한여객 농어촌버스가 있다.
광주 광천동 유스퀘어버스터미널에서 선운사행 버스가 1일 6회(08:50, 10:20, 11:50, 13:15, 14:50, 16:15) 운행하며 1시간 40분 소요에 7,800원이다. 선운사에서 광주행 버스는 11:00, 12:30, 14:00, 15:30, 17:05, 18:20에 출발한다.
숙식(지역번호 063)
선운사 입구에 숙박업소가 많다. 선운산관광호텔(561-3377), 선운산유스호스텔(561-3333), 다정민박(564-1050), 선운장여관(561-2035), 송악모텔 (564-8014), 펜션햇살 가득한집(562-0320), 경수봉민박(563-3419), 최씨민박(562-1605), 사계절민박 (564-8049) 등이다. 입구 일원에는 풍천장어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이 많다. 장어요리 값은 장어한정식과 장어구이 1인분이 2만원으로 맛과 가격은 비슷한 편이다. 황소식당(563-4646), 고향식당(563-1326), 선운식당(561-1960), 진흥가(563-3441) 등이다.
- ▲ 서정주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미당시문학관.
- 볼거리
- 미당시문학관
20세기를 대표하는 한국 서정시인 미당 서정주의 기념관이다.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어 선운산에서 자가용으로 15분 정도 걸린다. 서정주 생가는 집을 복원해 둔 것이라 볼 게 없지만 문학관은 얘기가 다르다. 겉에서 보면 평범하고 작은 기념관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의외로 크고 서정주의 흔적을 좇아가는 독특한 재미가 있다. 육필 원고와 생전의 집필실 서재를 옮겨 놓은 것을 비롯 미당의 유품 5,000점이 전시돼 있어 형식에 치우치지 않은 실속 있는 전시관이다. 계단식으로 전시된 건물 구조가 이채롭다. 관람은 무료이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전화 063-560-2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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