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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가을이 교차하는 길목, 계절과 상관없이 산이 그리워 견딜 수 없을 땐 다른 방법이 없다. “산에 갑시다.” 하는 느닷없는 전화에 “오케이!” 한마디로 시원하게 화답해 준 벗(김윤재)과 만나 화양동으로 향한다. 김윤재씨는 수필문단에서 인정받는 중견작가로 필자의 오랜 문우다.
주중의 조용한 한낮, 잘 꾸며진 국립공원 탐방로를 걷는 몸과 마음이 모처럼 하늘을 날 것처럼 가볍다. 오늘 운영담 물빛은 비취빛이다. 날씨와 시간대가 잘 맞아야 운영담을 유영하는 구름을 만날 수 있다. 만동묘(萬東廟)가 있는 화양서원은 최근에 말끔히 정비되었으나 세월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 유적지는 그저 유적지일 뿐, 마음이 반응하지 않는다. 계류 건너 우암 송시열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금사담의 암서재로 시선을 옮긴다. 언제 봐도 고즈넉하다. 마음만 먹으면 온종일 혼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는 곳이다.
- ▲ 일망무제가 펼쳐지는 도명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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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였던가, 해독이 어려운 난해한 시집 한 권을 저기서 다 읽어낸 기억을 하는 동안 화양3교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기 직전 오른편으로 도명산 2.8km 이정표가 보인다. 화양동주차장에서 화양3교까지 화양동의 절경을 만끽하며 걷는 것만으로도 워밍업은 충분하다. 오늘 산행은 화양3교를 들머리로, 학소대를 날머리로 잡았다. 산행거리는 약 6.5km, 짧은 코스이긴 하나 산행의 묘미를 유감없이 즐길 수 있는 멋진 코스다. 화양구곡의 3산(가령, 낙영, 도명)을 묶어 충북자연학습원을 들머리로 가령산과 낙영산에 이어 도명산(13.5km)으로 내려오는 코스 역시 굽이굽이 탄성을 자아내는 환상의 코스이긴 하나 초심자에겐 다소 무리다.
들머리의 데크가 끝나고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긴 여름 끝에 만나는 추색이 반갑다. 지난여름은 참 길고 지루했다. 어쩌자고 비는 그렇게 오던지. 첨성대를 지나 점차 휘모리 장단 가락 같은 길이 이어진다. 10여 분 가파른 경사의 숲길을 올랐을까 싶은데 하마 저 아래 길게 드리운 화양구곡의 자태와 함께 채운사와 암서재가 한눈에 조망된다. 길은 푹신한 흙길이다가 너덜겅이다가 가벼운 암릉구간의 철제계단을 지난다. 친절하게 이름표를 단 나무들과 적당한 위치에 세워진 이정표로 인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혼자 뒤늦게 따라붙은 윤태동씨가 합류하면서 산행은 더욱 활기를 띤다.
- ▲ 송림의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참나무 숲이 동화처럼 펼쳐진다.
- ▲ 화양구곡을 가로지른 학소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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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가 높아지고 경사가 가팔라지긴 하나 정겨운 숲길과 적절한 간격에서 만나는 너럭바위들, 암봉에서의 훌륭한 조망과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린 소나무 분재 전시장 같은 풍경들이 연이어 펼쳐진다. 노송의 나뭇가지 사이로 동편 낙영산의 길게 누운 흰 암반이 눈부시고 산 아래 계류를 조망하는 호사로 마냥 즐겁다. 엄살 심한 초심자라도 한 방에 매료당할 리드미컬한 산이다. 너덜겅길이 송림 속 안부로 이어진다. 안부에는 유난히 돌출한 바위가 있다. 한가운데를 파서 돌절구로 사용한 듯 보여 그 옆에 자그마한 토굴이라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안부를 지나고 나면 도명산 동편의 낙영산 절경이 유감없이 펼쳐져 또 한 번 걸음을 멈춘다. 정상을 코앞에 두고 만나는 바위와 바위 사이를 로프를 잡고 통과하고 나서부터는 호흡조절을 잘해야 한다. 사투 끝에 만나는 슬랩지대와의 황홀한 랑데부가 기다리고 있다. 정상 부근의 거대한 바위에 뿌리를 내린 노송들의 위엄엔 어쩐지 예를 갖춰야 할 것만 같다. 코앞에 정상을 두고도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다. 앞에는 수백 년 뿌리를 내린 큰 어른이 계시고 뒤에선 정상의 거대한 선바위가 어서 오라 호령한다. 배낭을 집어던지고 태동씨의 도움을 받아 바위를 기어오른다. 발끝이 허공에 뜬 듯 저릿저릿한데 사방팔방 펼쳐지는 조망에 탄성이 절로 터진다.
- ▲ 수직암벽에 선각된 마애삼체불. 그 아래 차고 맑은 석간수가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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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바위가 포개진 듯 서 있고 정상석 가까이 있는 바위들은 흡사 낙타의 등을 연상케 한다. 산에 든 지 두어 시간 만에 만나는 풍경으로는 실로 분에 넘친다. 산행 경력이 일천한 김윤재씨가 도명산 정상에서 벅차게 맞이하는 기쁨과 감동을 풀어놓는다. 여기에 산행을 권한 사람까지 합세한 탄성이 멈추질 않는다. 또 한 사람 버려놓은 것 같기도 하고, 건져낸 것 같기도 하다.
옅은 연무 속에서 멀리 동쪽으로 대야산과 청화산 능선이, 북으로는 군자산 능선이 보인다. 뒤로는 낙영산 공수부대의 암릉 유격장이 눈부시다. 정상석 앞 남쪽으로 세워진 도명산 경관 안내판에 소개된 산봉우리 이름들을 확인하며 먼 산의 봉우리 이름들을 하나하나 꿰맞춰 본다. 왼쪽으로 낙영산과 남산, 오른쪽으로 속리산 자락인 묘봉과 상학봉, 덕가산과 코뿔소바위, 금단산과 조봉산 연봉들을 퍼즐 맞추듯 하고 나서야 비로소 햇살을 피해 휴식을 취한다.
정상의 너럭바위 한가운데를 반으로 쪼개놓은 틈으로 뿌리가 굵어버린 노송 사이를 지나 바위 끝에 앉아 산그리메를 바라본다. 전날 밤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거푸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랬다. 물질이나 명예를 얻은 기쁨에 비할 바가 아닌 어떤 풍경들, 내게는 산에서 만나는 풍경들이 그렇다. 일상에 짓눌려 호흡이 가빠질 때마다 벗과 함께, 혹은 홀로 달려가 만나는 산의 풍경들, 심산(深山)의 안개 속에서 만나는 나무들이 그랬다. 산길에서 홀로 만나는 길가 나무들은 얼마나 정답고 미더웠던가. 큰 산은 큰 산대로, 작은 산은 작은 산대로 산을 호흡하고 오면 석 달 열흘은 씩씩하게 살아낼 것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에너지가 충전되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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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학소대 방향으로 내려선다. 화강암봉에 뿌리를 내린 노송들의 자태에 좀처럼 걸음을 떼지 못한다. 가파른 철제계단과 나무계단을 내려선 삼거리에 공림사와 학소대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서 있다. 공림사로 내려가고픈 유혹을 떨치고 예정대로 학소대 방향으로 접어든다. 거대한 바위들이 앞을 가로막는가 싶더니 이내 사방 바위벽에 갇히고 만다. 수직으로 버티고 선 30m 암벽에 삼체미륵불(충북유형문화재 제140호)이 선각되어 있다. 미륵불이 새겨진 암벽 아래 석간수가 솟는다. 물이 유난히 차고 달다. 주변 낙영사터는 무속인들이 촛불을 켜고 기도를 올리던 곳이었으나 이제 그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한껏 뒤로 꺾어 삼체미륵불을 눈에 담고 바위 틈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으로 희미해진 낙영사 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학소대 하산길에서도 탄성은 멈추지 않는다. 건너편 낙영산 유격훈련장의 흰 암반을 배경으로 기차바위와 코끼리바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기차바위는 우주로 향하는 은하철도 같은데 메텔과 철이는 보이지 않는다. 노송이 숲을 이룬 암벽허리에 설치된 철제난간을 지나면 이번엔 하늘을 찌를 듯한 참나무 숲이 펼쳐진다. 학소대로 향하는 완만한 경사의 숲길이 얼마든지 길어도 좋겠는데 계류를 가로지른 학소대교가 성큼 달려들며 오늘 산행의 종료를 알린다.
- ▲ 정상지대에서 자라고 있는 난장이바위솔.
- ▲ 정상부 직전의 바위굴. 마치 하늘로 통하는 문 같다.
- ▲ 능선의 바위 전망대 뒤로 길쭉한 기차바위가 보인다. 마치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은하철도 999 같다.
- ▲ 송시열의 숨결이 살아 있는 암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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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길잡이
○ 화양3교~첨성대~정상~마애삼체불~학소대~주차장 <원점회귀 3시간 소요>
○ 학소대~삼체미륵불~정상~삼거리~공림사 <4~5시간 소요>
주차장에서 화양구곡을 거슬러 올라 화양3교 직전에 오른쪽 데크를 들머리로 산을 오르기 시작하면 이내 이정표가 나타난다. 첨성대를 거치는 코스와 도명산 정상으로 바로 오르는 갈림길이다. 이 두 길은 정상을 1km 앞둔 마지막 안부에서 합류한다.
정상을 거쳐서 삼체미륵불과 낙영사터, 장군바위를 지나 학소대로 하산해 화양구곡을 따라 내려가면 화양분소 주차장이다. 정상에서 공림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코스도 그리 험하지 않고 아름답다(산행시간 4시간). 천년 느티나무가 아름다운 공림사 아래 사담마을에서는 택시나 버스 이용이 수월하다.
산행을 하지 않아도 화양동 주차장에서 화양구곡을 옆으로 끼고 자연학습원까지 걷는 왕복 10km 역시 아름다운 산책로다. 암서재 앞 계류에 가로놓인 간이 철다리를 국립공원관리소에서 철거해 버려 현재는 암서재를 볼 수 없다. 송시열의 숨결이 느껴지는 암서재를 보려면 채운사를 통해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
- ▲ 정상부 암릉의 허리를 휘돌아 설치된 철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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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
○ 대중교통
서울 동서울터미널에서 화양동까지 하루 3회 운행. 소요시간은 3시간 30분. 청주 가경터미널에서 하루 8차례 운행하는 화양동 행 시외버스는 1시간 20분 소요.
○ 승용차
중부고속도로→증평IC→청천면→화양동(증평에서 40분 소요). 혹은 경부고속도로 청원IC를 나와 32번 지방도로 이용 가덕→미원→37번 국도 이용. 영동고속도로 여주 방면에서는 충주를 거쳐 괴산IC로 진출한다. 화양동주차장 주차료 5,000원.
- 숙식 (지역번호 043)
인근 숙소는 화양민박(832-4392), 화양유스호스텔(832-8801), 보람원(833-1711) 등이 있다. 맛집으로 화양식당(832-4392)이 있다. 민물고기매운탕과 직접 채취해 조리한 손 도토리묵 요리가 일품이다. 그밖에도 도원리 한방오리백숙과 올갱이국을 하는 신토불이식당(832-5376), 송어, 향어회, 멧돼지, 오리주물럭을 하는 금평삼거리 우정가든(832-4080)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