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개월여동안 차범근의 선수 시절을 뒤돌아봤다. 이제 오늘은 '차붐의 영웅시대' 마지막 회이다. 차범근 현역 시절의 말년을 살펴볼 차례다. 86년 멕시코월드컵이 끝난 이후 차범근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세 시즌을 더 뛰면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당대를 풍미했던 대스타는, 그 누구라도 현역 은퇴라는 최후의 장벽과 싸워야만 한다. 언제나 '왕년의 자신'일 수는 없는 법.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때는,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오기 마련이다. 은퇴 시기를 잘 고르는 것도 선수에게는 중요하다. 슈퍼스타일수록 더욱 그렇다. 차붐은 이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간스포츠 81년 3월 18일자 커버에 실린 프랑크푸르트 시절의 차범근 |
◇'제대 말년'의 영예, 두번째로 UEFA컵을 들어 올리다
차범근은 그런 면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이었다. 현역 막바지에 두번째로 유럽축구연맹(UEFA)컵을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으니 말이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레버쿠젠의 우승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골을 터트렸으니 스트라이커로서 이처럼 황홀한 마무리는 없었으리라.
레버쿠젠은 88년 클럽 창단 이후 처음으로 UEFA컵 결승에 진출했다. 상대는 스페인의 에스파뇰이었다. 하지만 레버쿠젠은 원정 1차전에서 0-3으로 완패하면서 사실상 우승이 물 건너간 듯한 분위기였다. 홈 2차전에서 기적이 일어났다. 레버쿠젠은 홈팬의 열광적인 응원 속에 2-0으로 앞서 갔고 결국 차범근이 승부를 원점으로 돌리는 세번째 골을 터트렸다. 1·2차전 합계 3-3이 된 양 팀은 승부차기에 돌입해 레버쿠젠이 4대2로 승리하며 UEFA컵을 품에 안았다. 이 때 차범근의 나이 35세. 현역 시절의 마지막 영광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순간이었다. 차범근은 이 때의 감격을 '스포츠서울'에 직접 전해왔다.
<8년만에 UEFA컵이 서독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바로 내 품으로. 간간이 보이는 노란 바탕의 까만 붓글씨 응원 플래카드는 8년 전과 다른 흥분을 나에게 더해 주었다. '범근아, 너 알지. 끝내줘라' 나의 세번째 골이 터졌을 때 이미 UEFA컵은 8년 전의 나에게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바로 이 감격스러운 순간에 나의 축구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충동은 너무 감상적인 것이기만 할까. 더 이상 바랄 것도, 바라고 싶은 것도 이제는 없다. 왁자지껄 집으로 몰려든 한국 손님들이 프랑크푸르트를 향해 떠난 것은 새벽 2시였다. 도무지 잠자리에 들 수 없는 흥분 때문에 슬리퍼를 끈 채 파티장에 다시 돌아갔을 때는 레버쿠젠 시도, 파티장도 온통 취해 있었다. 깊은 밤에 빵빵거리면서 돌아다니는 자동차, 어깨에 어깨를 걸고 훈훈한 초여름 밤을 맥주로 식히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무리들이 레버쿠젠을 온통 메우고 있었다. 그 밤의 모든 일들이 꿈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픈카를 타고 시민들 사이를 누비며 8년만에 안아보는 UEFA컵은 어느새 살찐 아들 녀석(당시 8살이 된 두리를 말한다)처럼 휠씬 무거워져 있었다. 이처럼 무거울 줄이야.>
레버쿠젠 시절 내한경기를 위해 귀국했을 때의 모습. 83년 7월 13일자 주간스포츠 표지, |
◇마지막 시즌을 앞둔 차붐, 300경기 출장-100골을 달성할 것인가
독일에 진출한 후 줄곧 공격수로 뛰었던 차범근은 1987~1988시즌에 처음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 시즌에 차범근은 25경기에 나서 4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의 대미를 UEFA컵 우승으로 장식했다. 이제 88~89시즌이 시작하려 하고 있다. 슈퍼스타 차범근의 현역 시절 마지막 시즌이었다. 그 전 시즌까지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통산 279경기 출장에 95골을 기록하고 있었다. 마지막 시즌을 앞둔 차범근의 목표는 당연히 300경기 출장, 100골 달성에 모아졌다. 팬의 관심도 마찬가지였다. 차범근은 88~89시즌 개막을 앞두고 일시 귀국했다. 6월 11일자 스포츠서울과 귀국 인터뷰를 보면 차범근의 마지막 목표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다음 시즌 계획은
당초 목표했던 분데스리가 통산 100골 고지를 점령하겠다. 5골만을 남겨두고 있어 가능하리라고 본다. 쾰른체육대학에서 실시하는 6개월 코스의 축구지도자 교육도 받을 생각이다. 학기가 시즌 중인 3월에 시작돼 9월에 끝나는데 신임 리너스 미셸 감독으로부터 학교에 나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선수로 더 뛸 생각은
나 자신 어려운 무대인 분데스리가에 뛰어 들어 스타 대접을 받으며 원 없이 그라운드에 땀을 쏟았다. 몇 년 더 뛰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선수는 팬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제 선수생활을 마감할 때가 아닌가 한다.
-분데스리가에서의 보람은
유독 서독은 UEFA컵에 약한 징크스가 있었다. 지금까지 바이에른 뮌헨과 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 등 세 팀만이 이 대회 정상에 올랐을 뿐이다. 지난 9년 동안 개인적으로 UEFA컵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두번이나 누렸으니 선수로서 그보다 더 큰 보람이 어디 있겠는가. 지난 80년 프랑크푸르트에서 UEFA컵 우승이 나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계기였다면 이번 레버쿠젠에서의 우승은 내겐 결산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시련이 차범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차범근은 89년 1월 시즌 휴지기에 진행된 스페인 전지훈련 도중 아약스 암스테르담(네덜란드)과 친선경기에서 상대선수와 부딪치면서 갈비뼈가 다쳤다. 독일에 진출한 이후 척추(81년), 오른쪽 말목 인대 수술(85년)에 이은 세번째 주요 부상이었다. 차범근은 부상 직후 "300경기 출전, 100골 목표를 달성하고 은퇴하려 했는데 차질을 빚을까 안타깝다"고 말했다.
마지막 시즌의 부담, 뜻하지 않은 부상 등이 겹치면서 차붐의 목표 달성은 쉽지 않게 됐다. 시즌 전기 일정에서 2골을 넣었던 차범근은 89년 3월 12일 도르트문트와 후기 4차전에서 시즌 3호이자 통산 98호골을 넣었다. 그의 296번째 분데스리가 경기였다. 300경기 출장, 100골에 점점 다가서고 있었다. 차범근은 그해 4월 15일 쾰른과 홈경기에 출전해 분데스리가 통산 300경기 출전의 금자탑을 세웠다. 레버쿠젠은 이제 그 해 시즌에서 단 8경기만을 남겨 놓고 있었다. 그는 300경기 출장은 이룬 뒤 "부상 등 많은 시련 속에서도 외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300경기 출장 기록을 수립한 데 대해 큰 보람을 느낀다. 남은 8경기에서는 골을 넣는 데 힘써 100골 목표도 꼭 채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한 경기, 한 경기 줄어들수록 골을 터지지 않았다. 차범근은 시즌 한 경기를 남겨놓았던 함부르크 원정경기에서 통산 307째 경기에 출전했지만 전반 20분만에 상대 선수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부상으로 교체아웃됐다. 시즌 한 경기를 남겨놓고 98골을 기록중이어서 100골 달성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드디어 6월 17일 카이저스 라우테른과 시즌 최종전이 벌어졌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고별전을 치렀지만 골은 없었다. 통산 기록은 308경기 출전에 98득점으로 남았다.
차범근이 기록한 98골은 모두 필드골이었다. 페널티킥을 통해 얻은 골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독일에서 페널티킥을 찬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100골을 달성했다면 수치상의 의미는 있었겠지만, 98골이라는 미완의 숫자는 더욱 심오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히려 여지를 남겨둔 차범근의 기록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될 한국축구의 무한한 도전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린 시절의 두리(오른쪽)가 웃으면서 아버지 차범근의 코를 쥐어뜯고 있다. |
◇수도승 같은 생활이 지금의 차붐을 만들었다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3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세운 뒤 스포츠서울(89년 4월 21일자)과 10년 동안의 독일 생활을 결산하는 특별 인터뷰를 가졌다.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차붐이 10년 동안 어떤 각오로 버텨왔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분데스리가에서 넘어야 했던 첫 관문은
능력있는 선수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어린 선수,처음 소개된 선수들을 그들은 좀처럼 인정하지 않습니다. 두어달 정도쯤 누구나 '개발에 땀 나듯' 잘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버리지요. 실제 상당 기간 스타로 매스컴의 각광을 받던 선수들이 몇 년 후 어느 팀에서 무얼하며 지내는지 알 수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자리를 굳히기 전에 잘못 삐긋하면 사정 없이 날아가는 거지요. 기라성처럼 많은 선수들이 벤치에 초조히 앉아서 남의 실수를 고대하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린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오금이 떨려서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을 정도지요.
-동양인 또는 한국인으로서의 고충은 없었는지
기술, 기량만 인정받고 나면 다른 어려움은 별로 없습니다. 물론 경기 중 망나니처럼 뛰어 달아나는 나를 잡으려다 기진맥진한 상대 팀 수비수들이 "한국 놈들이 어쩌구 저쩌구"하고 지분거리도 하지요. 처음엔 화가 나서 씩씩 거렸지만 차차 "나를 약 올리기 위한 수단이로구나"하고 알게 됐습니다. 이제는 유일한 동양 선수라 이색적인 존재가 되어서 그런지 오히려 가는 데마다 날 찾고 내세워 팀의 간판처럼 들먹이게 됐지요.
-10년을 한결같이 주전 선수로 뛸 수 있었던 비결은
가능한 모든 육체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힘을 비축해 두었다가 경기장에서 전력을 쏟아붓는 거지요. 축구란 감각으로 하는 운동입니다. 순간적으로 찬스 포착과 기민한 반응으로 승패를 가름하게 됩니다. 그런데 잡다한 일에 신경을 쓰고 몸 관리를 게을리하다보면 경기장에서 정신 집중을 할 수도, 90분간 최고의 컨디션으로 뛸 수도 없게 됩니다. 나는 날 괴롭히거나 귀찮게 구는 일들을 싫어하고 그래서 많은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절간에서 사는 수도승이라나요. 하지만 그런 철저한 생활이 아니었더라면 오늘의 차범근은 생각할 수 없었을 겁니다.
-선수생활을 결산하면서 남는 아쉬움이 있다면
분데스리가 베스트11까지 오를 수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높은 한 단계,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등이 서 있던 경지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더욱이 처음 분데스리가에서 뛰던 정열과 패기였다면 충분히 오를 수 있었던 곳에 나는 적지 않은 사람들과의 오해와 갈등으로 훈란에 빠져 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아쉬움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서독생활에서 얻은 교훈은.
독불장군은 없다는 것, 나보다 잘하는 선수는 어디에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훌룽함을 인정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세, 그리고 페어플레이 정신은 이 다음 지도자 생활에서도 큰 도움이 될 교훈들입니다. 감독이 가장 싫어하는 선수라도 그 기량을 인정하고 경기에 출장시키는 모습을 목격할 때엔 존경심이 절로 우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프로선수로의 10년을 마감하는 기분은
의외로 담담합니다. 그 전에 선수생활을 그만 둘 때 굉장히 섭섭할 줄 알았는데 정작 때가 이르니 오히려 그만 둘 날이 기다려지는데요. 지친 탓일까요. 이제 내개 새로운 할 일들이 있고 선수생활은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습니다.>
선수 차범근은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그가 은퇴한지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차범근이 한국축구가 낳은 최고의 슈퍼스타라는 데는 아직까지 별다른 이의가 없는 듯하다. 한국축구는 언제쯤 '차범근을 뛰어 넘는 선수'을 볼 수 있을까. 차범근은 과연 그의 남은 축구인생에서 '불세출의 선수'를 뛰어넘는 성과를 남길 수 있을까. 이 모든 질문들은 역설적으로 차범근이라는 선수가 얼마나 위대했는지를 웅변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