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이 지긋지긋한 19년 사우디전 무승 징크스를 깨고 월드컵 본선 진출의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한국은 20일 사우디 리야드 킹파하드 경기장에서 열린 2010 남아공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3차전 사우디와의 경기에서 후반 32분 박지성의 어시스트를 받은 이근호의 선제골과 종료 직전 인저리 타임에 나온 박주영의 추가골에 힘입어 2-0 승리를 거뒀다.
이로써 한국은 지난 1989년 열린 이탈리아 월드컵 최종예선서 2-0 승리를 거둔 이후 19년간 사우디를 이기지 못했던 한을 풀었다. 마지막 승리 이후 한국은 사우디와 6차례 맞붙었지만 3무3패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아울러 한국은 월드컵 최종예선 B조에서 2승1무 승점 7점을 기록, 조 선두를 굳건히 지켰다. 같은 날 열린 이란과 아랍에미리트의 경기에서 두 팀이 1-1로 비긴 덕분에 한국은 2위 이란(1승2무)과의 승점차이를 2점으로 벌려 한층 여유있게 선두자리를 지키게 됐다.
7만명을 수용하는 대형 경기장을 사우디 관중들이 가득 메우고 낯설고 몽환적인 아랍 음악이 계속 흐르는 가운데 한국은 힘겨운 원정경기를 시작했다.
한국은 정성훈(부산)-
이근호(대구) 투톱에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김정우(성남), 기성용, 이청용(이상 서울)을 미드필드진에 배치했다. 또 이영표(도르트문트)와 오범석(사마라)은 측면수비수로 기용됐고 중앙수비수로는 강민수(전북)와 조용형(제주)이 선발 출전했다. 골키퍼는 1년여 만에 대표팀에 복귀한 노장 이운재(수원).
경기 초반에 결정적인 위기와 찬스를 한 번씩 경험했다. 한국은 전반 5분경 사우디의 코너킥 때 두 차례나 완벽한 실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헤딩슛과 곧바로 이어진 슈팅 모두 골 문 앞에 있던 이영표가 몸으로 막아내면서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곧바로 역습 찬스에선 이청용이 사우디 진영 오른쪽을 돌파한 뒤 거의 노마크 찬스에서 가운데 이근호에게 패스를 했지만 사우디 골키퍼의 손에 걸려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이후에도 한국과 사우디는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두 팀 모두 역습을 주요 전술로 준비한 듯 공격기회가 올 때마다 빠르게 공격을 펼쳤다. 그런 가운데 한국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우디의 측면을 파고들면서 서서히 주도권을 잡아나갔다. 사우디 진영에서 여러 차례 세트피스 기회도 만들었지만 득점으로 이어지는데는 실패했다.
사우디의 날카로운 공격을 잘 막아낸 한국은 전반 27분경 박지성이 상대 수비수의 공을 빼앗아 크로스로 찔러준 것을
정성훈이 발을 갖다 댔지만 골키퍼에게 막혀 아쉬움을 자아냈다. 한국은 전반 31분에는 나예프 하자지에게 결정적인 슈팅을 허용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 곧바로 긴 스루패스를 받은 이근호가 쫓아가 빠른 슈팅을 시도했지만 골키퍼의 손에 걸려 골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한국은 사우디의 거친 플레이 덕분에 여러 차례 사우디 진영에서 프리킥 기회를 만들었지만 확실한 득점 찬스는 잡지 못했다. 사우디의 정교하고 빠른 돌파는 효과적으로 막아냈지만 전반 중반 이후 경기 주도권은 사우디에게 내준 채 한국은 전반전을 마쳤다.
후반전 시작과 함께 한국은 득점이나 마찬가지인 천금 같은 기회를 무산시켜 큰 아쉬움을 낳았다. 한국은 사우디 문전에서 몇 차례 다이렉트 패스에 이어 이근호와 정성훈이 결정적인 슈팅을 시도했지만 두 번 모두 골키퍼 선방에 막혀 골로 연결되지 않았다. 후반 6분에는 사우디 진영 정면에서 정성훈이 중거리슛을 시도했지만 골문을 크게 벗어났다.
한국이 후반전 들어 공격 점유율을 높이는 가운데 행운도 따랐다. 전반 14분 경 사우디의 최전방 공격수 하자지가 골키퍼 이운재와 맞선 1대1 단독찬스에서 이운재에 부딪혀 넘어졌다. 하지만 주심은 페널티킥 대신 헐리웃 액션으로 판단해 옐로카드를 내밀었고 결국 하자지는 경고누적으로 퇴장을 당했다.
수적 우세를 등에 업은 한국은 보다 거세게 사우디 골문을 공략했다. 특히 정성훈과 기성용이 헤딩으로 득점을 노렸다. 후반 23분에는 박지성이 날카로운 중거리슛을 시도했지만 골문을 살짝 벗어났다.
10명으로 싸우는 사우디는 긴 패스로 최전방에 한번에 넘겨주는 작전을 펼치며 수비 뒷공간을 노렸다. 특히 후반 20분 이후 사우디는 개인기를 앞세운 돌파로 한국 수비를 흔들려는 의도가 역력했다. 하지만 한국 수비진도 침착하게 사우디 공격수들을 막아내면서 효과적으로 위기를 넘겼다.
허정무 감독은 후반 28분 정성훈을 빼고
박주영(AS모나코)을 교체 투입해 공격에 변화를 줬다.
결국 기다리던 득점은 후반 32분에 가서 드디어 터졌다. 사우디 진영 왼쪽에서 이영표가 크로스로 올려준 볼을 박지성이 반대편에서 가슴으로 트래핑한 뒤 슈팅을 시도했다. 이것이 수비수 사이를 뚫고 옆으로 흐르자 골문 앞에 있던 이근호가 가볍게 밀어 넣어 귀중한 선제골을 뽑았다. 이근호로선 자신의 A매치 6번째 골이자 3경기 연속골 행진이었다.
이후에도 한국은 공격의 고삐를 풀지 않고 거세게 몰아붙였다. 종료 직전 이근호를 빼고 염기훈을 투입하는 등 추가득점을 계속 노린 한국은 후반 종료 직전 두 차례 위협적인 슈팅을 허용하기도 했지만 간신히 위기를 넘겼다.
결국 한국은 경기 종료 직전 인저리 타임때 교체로 들어온 박주영이 오른발로 추가골을 넣으면서 중동 원정 승리의 쐐기를 박았다. 프랑스리그 진출 후 오랜만에 대표팀에 돌아온 박주영으로선 조커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한국의 기분 좋은 승리를 견인했다.